성경적 세계관×정치사회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의 신앙관, 기독교인들이 보고 배워야

성령의 오른말씀 2024. 9. 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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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간과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김대중에 관한 신상정보가 있다.
바로 그가 상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다.
김대중의 종교관 정보 출처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https://naver.me/53YqTigv)


그의 자서전들은 거의 무슨 신학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선 그의 자서전들 중 하나인 [옥중서신]을 가지고서 김대중의 신앙관을 본격 해부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글쓴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걸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가톨릭 신자의 신앙관을 연구하고 배우자고 하느냐"라고 따질 수도 있겠으나, 그 사람들은 다음의 사실을 유념해주길 바란다.
그건 바로 김대중이 비록 가톨릭 신자임에도 일반적인 기독교인보다 더욱 기독교인다운 신앙관을 품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김대중은 몇몇 기독교 목사들이랑 친분을 쌓았었고, 기독교 신자인 이희호 여사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인 글쓴이가 그동안 성경을 상고하면서 고찰한 끝에 결론을 내린 몇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김대중은 이미 훨씬 전에 비슷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래서 본 포스팅에선 본격적으로 김대중의 그러한 신앙적 고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쓴이는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각자를 돌아보게 되고, 성경을 상고하게 되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되는 지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 바울의 말세주의에 기울어진 기독교인들

예수는 이 세상에 머물며 지배받는 민중의 해방의 길에 몸바쳤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도 이웃사랑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중략)
사도 바울은 소위 그리스도교의 제2대 교조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공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말세사상, 말세주의에 기울어 예수님이 보이신 현세에서의 이웃사랑을 통한 사회의 향상개선을 부당하게 경시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바울적 경향은 거의 2000년을 두고 계속되어왔는데 이제야말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친 본연의 길로 복귀하지 않으면, 종이신 예수의 길로 우리 교회와 믿는 이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격랑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역할도 보람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40~42에서

김대중이 사도 바울을 향해 그리스도교의 제2대 교조라고 칭한 이유는 실제로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다른 제자들보다 바울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바울이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사도'라고 칭함받고 있고(다른 제자들도 사도가 맞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만 바울을 지칭할 때 '사도'라는 칭호와 함께 부른다.), 우리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데에 열심을 다 했고, 신약의 약 3분의 1을 집필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비교적 덜 해보이지만, 심지어는 바울과 비교해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깎아내리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은혜 구원)을 강조하고, 야고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행위 구원)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주관이 섞인 해석이 초래한 오해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오해를 진실로 믿고서 여기저기 다 설파하고 다니다보니, "김대중 또한 바울에 대해서 오해한게 아닐까", 하고 글쓴이가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또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복음서 중 말세와 내세에 대한 내용에만 집중하는 경향도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는다.(글쓴이는 지금 이 구원론이 틀렸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나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영원한 구원을 받았고, 말세와 내세(예수재림과 심판)에 대비해야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상의 일(현세에서의 이웃사랑과 사회 개선)엔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은 바울적 말세주의 경향에 더더욱 매몰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이 정확히 꿰뚫었듯,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선 육신을 입고 이 지상에 내려와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며 솔선수범을 보이셨다.
(단, "하나님을 믿건 안믿건, 이웃 사랑을 통해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김대중의 해석은 잘못된게 맞다.)
자신의 신성한 능력을 몸이 병든 자와 마음이 병든 자를 위해 쓰셨다.
또한, 성경은 우리더러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되(요한복음 12:46, 47/요한복음 17:14-16),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되라고(마태복음 5:13-16)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상고해보지도 않고 앞으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른다면, 김대중이 지적한대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격랑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역할도 보람도 찾지 못할 것이다.
즉, 이 세상에 기독교인이란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구 민주주의의 큰 물줄기이자 바탕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플라톤은 인간성을 악으로 보고 철인에 의한 교육과 지배를 통한 전체주의적 사회를 꿈꾸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로 인간은 본래 선한 것이며 자연법의 원리에 의한 사회의 개량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예수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장되었으며 이것은 사상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의 일생은 자유의지의 일생이었습니다. (중략)
그뿐 아니라 예수는 우리를 죄인의 입장에서 무조건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아들, 즉 그 자신의 형제의 입장에 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의 권리를 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당신과 나, 일 대 일의 동등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역사에 동참한 것은 아들로서의 자유의지에서지 종으로서의 강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자유는 천부의 권리인 것이며 불가양不可讓이며 불가침不可侵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이 서구 민주주의의 큰 물줄기이며 바탕인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42, 43에서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도 장로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믿을게 되지 못한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예수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장되었으며 이것은 사상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재조명하면서, "예수의 일생은 자유의지의 일생"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단언했다.
예수님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십자가 위에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죄인에서 해방시키고 자신과 동등한 형제 관계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시킨, 이 기독교 정신.
(사실 예수님의 희생 만으로 죄인인 우리들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게 아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비로소 예수님과 동등한 관계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서구 민주주의의 큰 물줄기이며 바탕이라는것을.
한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는데, 인간을 본래 악한 존재로 규정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철인(말하자면 엘리트)이 군중을 교육시키고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지향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이 공산주의 이론을 지탱하는 뿌리라는 것을.

출처: 위키백과
출처: 위키백과

그래서 공산주의 체제는 1인 독재체제로 갈 수 밖에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우매한 군중에게 리더를 선출할 투표권을 비롯한 참정권을 준다는건, 공산주의자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반문하고싶은건 다음의 2가지이다.

(1) 그 철인에겐 본래 악한 본성이 없는가?
그 철인은 인간이 아니란 건가?

(2) 역사적으로 지금까지의 공산주의 독재자들을 보면, 그들 모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는가?

물론,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대신해서 나라를 경영해야 하는것이 맞다.
하지만 이 또한 국민들 개개인이 자유의지로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들을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압제하는 것이 아닌 국민들을 설득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국익과 민생을 위해 나라를 경영해나가는 것에 개개인의 자유의지로 동참할 수 있도록 국민들을 독려해야하는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조차 국민들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반영된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장로교 기독교인들과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항상 잘못된 선택만 한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그럼 자유민주주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장로교 기독교인들은 예정론을 믿기에 소수의 사람들만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 전에 택함 받아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혀 반영되지않는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하나님께선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해주셨고, 선악과를 따먹을지 말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두셨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바람에 우리 인간들은 죄의 노예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셔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지상으로 보내셨고, 그 외아들 예수님께선 자신의 자유의지로 십자가 위에서 희생함으로써 그를 믿는 자마다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구원의 문까지 마련해주셨다.
그리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지 말지는, 우리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하는것이다.
생명(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고, 멸망(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마태복음 7:13, 14).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행사하는것도 마찬가지다.
국익과 민생을 위하는 정치인은 오히려 우리 입에 쓴 정책들을 공약으로 세우고, 자신의 기득권만을 챙기는 정치인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 정책들을 공약으로 세운다.
어떤 정치인을 선출할 지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것이다.
그럼에도 장로교 기독교인들과 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딜레마 타령이나 하면서,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던지,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즉 독재자의 존재도 정당화된다." 따위의 개소리도 당당하게 짖어대는것이다.
이들은 본인이 일반 대중을 선도할 생각도 없거니와, 본인이 우매할 수도 있는 가능성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

내가 판단하기로는 예수의 이 말은 ‘카이사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세상 일반의 권리, 즉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는 것, 또는 유태교 율법의 일상적 규칙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인 정의로서 따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자의 권리가 아닌 하느님의 것인 신앙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등 절대적 정의에서는 생명과 바꾸더라도 카이사(지배자)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훈으로 봅니다. 과연 예수는 부당한 줄 알면서 자신의 성전세도 냈으며 병이 나은 자에게는 제사장을 찾아가 모세의 율법대로 예물을 바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민중에 대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이를 하느님의 것에 대한 침해로 보고 단호히 투쟁했으며 죽음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서기 313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합법화되기까지 로마에서는 수많은 기독교인의 희생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때도 일반 로마 시민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평소에는 정부의 말에 그토록 순종하면서 왜 고개 한 번 숙이면 되는 카이사에의 참배를 반대하고 죽음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신앙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권리, 즉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44, 45에서

나는 김대중이 마태복음 22장에서 언급되는 카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깊이 고찰했다는 사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 말씀을 두고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걸려 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세상의 법과 지배자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정부에 무조건 순응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않다.
(단, 어떤 이들은 정부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소속이 아니면, 태세를 180도 전환하기도 한다.)
물론 위 자서전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예수님은 부당한 줄 알면서도 성전세를 냈으며, 자신의 이적으로 병이 나은 자에겐 제사장을 찾아가 모세의 율법대로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김대중이 지적한대로, 그 분께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 그리고 민중에  대한 인권침해에 대해선 하나님의 것에 대한 침해로 보고 단호히 투쟁하셨다.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 예수님께선 간음한 여인을 당시 유대 사회의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며 담대히 외치셨다(요한복음 8:3-11).
당시 유대 사회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을 살인하는것이 허용됐지만, 하나님의 법에선 간음한 사람을 살인하는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건 세상의 법(카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법(하나님의 것)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진리이다.
그리고 애초에 카이사의 것도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해주신 것에 불과하다.
세상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카이사의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기에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카이사에게 바치면 그게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니,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냐 마느냐의 문제로 스스로 올무에 걸리지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위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법과 통치를 거스르면서까지 세상의 법과 지배자에 무조건 복종하라는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은 천주경을 통해서 이미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지상에서의 행복을 중시하여 병자를 고치시고 빵과 생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형제에게 밥 주고 물 주고 옷 준 사람이야말로 천국을 차지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물론 천국이 우리의 최후 목적이지만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현세 경시,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의의 지배자들의 편리에 봉사하는 것은 그릇된 그의 후계자들의 과오인 것입니다. 도대체 눈에 보이는 현세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데 이것을 제쳐놓고 아직 보지 못한 내세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과 같이 인간이 현실적이고 실증實證적으로 된 세상에서는 빈축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오늘의 기독교는 무신론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 기계機械능률, 동조성同調性 등의 우상숭배 그리고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대중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상은 무관의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지적하듯이 천국과 지상은 입방체(천국)와 저변底邊(지상)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상이 바로 천국과 같을 수는 없지만 지상에서 하느님의 정의 실현은 가능한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가 이를 위해 노력조차 않는다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빈축을 허언虛言이라고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45, 46에서

김대중은 천국과 지상의 관계를 다루면서 다시 한번 더 기독교인들의 현세 경시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주경(기독교에선 '주기도문'이라 일컫는다.)의 일부 내용을 인용했는데,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난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주기도문 중 딱 그 부분을 인용하면서, 지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나라(천국)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천국)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런데도 기독교인들, 특히 자칭 보수우파 기독교인들은 "이 지상에서 부당함과 부조리를 바로잡아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사람들"을 죄다 싸잡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곤 한다.
물론 인간의 의지 만으론 지상 유토피아를 만들 순 없으며, 예수님이란 진리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자복한 다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거듭나여야만 유토피아(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추후, 포스팅으로 자세히 다루겠음.)
하지만 지상 유토피아를 꿈꾸며 사회를 개선해나가려는 본성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으로서 결코 반기독교적인게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천국)가 이 지상에 임할 수 있도록,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천국)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내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런데 좌파 기독교인들은 안티기독교가 뿌리인 공산주의를 추종하고 있고, 우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훼방을 놓고 있는게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단언컨대, 한번 구원 받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게 아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계속 외면한 채 교회 안에서 잘못된 복음에 근거한 천국뽕만 주입시킨다면, 김대중이 경고했듯이, 우리가 과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구호를 공산주의 망령이 떠드는 허언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는 공산주의를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자본주의를 세상에서 단 한 개의 오류도 없는 완벽한 체제로 보지도 않았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를 전복의 대상으로 보긴 커녕,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운영해야한다고 주장하긴 했다.)
스스로 우파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도 자본주의가 완벽하지 않단걸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또한 인간의 의지론 어제보다 더 나은 세상조차 만들 수 없다고 믿으며, 인류와 사회의 진보에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들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불공정과 차별이 만연한건 어쩔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만 이 모든게 해결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로 인한 염세주의에 불과하다.
김대중이 지적한대로, 현세의 문제에서조차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않는 내세만을 얘기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 이웃 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

자기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사랑을 통한 하느님 사랑이요, 이웃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조차 바친 예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실패자였습니다. 마지막 처형될 때는 믿던 제자도 차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의 교훈은 생전에 세상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00년이 된 오늘 예수만큼 위대한 성공자는 없습니다. 그의 희생은 결국 눈부신 자기현현顯現이 되었습니다.(중략)
인간은 본질적으로 패자의 운명 속에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운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 속에 살다 죽은 사람만이 그 진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顯現 자기를 완성합니다. 진리란 우리의 양심이 받아들이는 인간의 길일 것입니다. 양심의 길이란 이웃사랑의 길이며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사랑하며 독생자까지 보내시고 희생시키신 하느님의 길일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길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은 예수와 같이 영원한 승자이며 지상의 행복자일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험하고 고난의 길이지만 결코 불행의 길도 불가능의 길도 아닐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47, 48에서

김대중은 자기 십자가는 곧 이웃 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 또한 지극히 성경적이다.

다음은 마태복음 25장 34~46절 말씀이다.

마태복음(마) 25장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위 말씀에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들 중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 행동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우리의 형제자매가 굶주리거나 목 말라하거나 떠돌거나 병 들거나 억울하게 옥살이하게 하고 있을 때, 우리가 그를 돌보지않는 것은 곧 예수님을 돌봐드리지 않는것과 같다.
물론 여기서의 이웃은 예수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에 한정되긴 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2장 28~31절 말씀과 로마서 13장 8~10절 말씀을 보여주겠다.

마가복음(막) 12장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로마서(롬) 13장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처럼 성경에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으뜸 가는 계명이라고 명시하면서, 남(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계명)의 완성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계명은 이웃 사랑에 요약되어있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그 말씀인즉슨, 하나님 사랑도 결국 이웃 사랑을 통해 지켜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김대중의 해석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단적이기만 하는가?
비록 그는 가톨릭 신자지만, 어지간한 기독교인들 보다도 성경을 깊게 상고하고 신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구원론을 제외하고선 지극히 성경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 포스팅에서 김대중의 신앙관에 대해서 다루면서, 나 글쓴이 또한 그가 얼마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 글쓴이도 인간의 노력 만으론 성경의 진리를 전부 통달하기란 어렵단걸 인정하며, 성경의 진리를 알기 위해선 성령의 조명하심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동시에 그가 나보다 앞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지만, 구원론을 제외하면, 나와 신앙적으로 결이 정말 비슷한 사람이란걸 다시금 실감하였다.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기독교인인 내가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을 극찬하면서 "나와 신앙적으로 결이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고 평한 것을 두고서 나를 정죄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딱 그 부분이 그들이 반성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가톨릭을 기독교라고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가톨릭의 마리아숭배와 교황숭배, 연옥 등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단지 김대중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신앙적 고찰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일일이 따져보지도 않고서 그의 "모든 주장"을 다짜고짜 이단으로 정죄할 생각도 없다.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과연 틀린 말만 할까?
현재 기독교의 교파도 참으로 다양한데, 과연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관은 성경적이기만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장로교의 교리와 신앙관이 침례교의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데, 둘 다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가?
결국 교파도 사람이 만든 것인데, 각 교파의 교리와 신앙관에는 과연 오류가 한 점도 없을까?
더 나아가, 다양한 교파 안에 제각각 속해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세속적이지 않고, 김대중만큼 성경연구에 열심을 다 하고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이 질문들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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