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은 정치인이기 전에 사상가였고, 그의 사상적 지향점은 그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추후 포스팅에서 다룰 내용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상 중에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있다.
그리고 김대중이 또 하나 강조하던 게 바로 실사구시다.
그는 IMF 외환위기 구제 건으로 미국의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조지 소로스를 만났을 때에도, '실사구시'라고 쓰인 연호를 전달할 정도로 그는 그것을 자신의 평생의 철칙으로 여겼다.
여기서 '실사구시'란 단어 자체가 생소한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이 실사구시적 태도를 정치적 행보로서 어떤 식으로 드러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해본 사람들도 겨우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본 포스팅에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김대중의 그러한 행보와 정책에 대해서도 다뤄보도록 하겠다.
● 실사구시의 정의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실사구시이다.(중략)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대진(戴震) 등을 들 수 있고 그들의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實學)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이 실학사상은 조선 중기, 한국에 들어와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켰으며 이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이 땅에 실학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탄압을 받고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 때문에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방법론이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희(金正喜)이다. 그에 앞서 홍석주(洪奭周)는 성리학과 고증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에 섰지만, 김정희는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실천을 역설하였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두산백과] https://naver.me/IFjQLUBM
위 내용을 정리하자면, 실사구시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를 말하는건데, 여기서 '사실'이란 실질적인 경험(실험과 연구)을 통해 얻게 된 객관적 사실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이론이 아닌 실제 경험을 중시한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과학적인 태도는 당시 주류였던 성리학 특유의 공리공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배격하면서, '실학'이라는 학파까지 낳게 된다.
* 공리공론: 실제로 소용이 없고, 사실과 동떨어지며, 실천이 없는 헛된 이론.(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원불교대사전)
* 형이상학: 초경험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형이하 또는 경험적 대상의 학문인 자연 과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여기서 우리는 김대중이 어째서 좌파 진영에 속해있으면서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본 포스팅 후반부에서 김대중은 오히려 자유 진영에 속하는 미국과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는 자유우파적인 행보를 보여줬다는 사실을 다루고있다.)
공산주의가 듣기엔 아름다운 동화 같지만, 현실에 적용하기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자는 공산주의가 완벽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 이론대로 완벽하게 흘러가는걸 직접 경험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즉, 공산주의는 실험과 연구로 검증되지않은 이론에 불과하다.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가 실사구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 실학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실학이 어떤 성격을 띠는지 알아야 우리도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실사구시를 제대로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실학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겠다.
《 실학 》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당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강조했다.
실학(實學)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유학의 전통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된 말로 폭넓게 쓰여 왔다. (중략)
(남송의)주희(朱熹)는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를 ‘무용한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명(明)의 나흠순(羅欽順)과 왕정상(王廷相) 등은 송·명 시대 이학(理學)의 학풍을 비판하며 인간의 실제 생활을 중시하였고, ‘실사구시의 학문’이라는 실학의 새로운 개념을 세웠다. (중략)
일본에서는 실학이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서구의 과학·기술의 수용을 강조하고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며 나타난 새로운 학문 경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한국에서도 유학자들은 일찍부터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허학과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중략) 고려 말기에 불교 비판에 나선 성리학자들도 도교와 불교를 허무와 적멸에서 진리를 찾는 허학이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고려 후기 이제현(李齊賢)은 사장학(詞章學)에 대해 경학(經學)을 실학이라고 나타냈고, 조선 전기에도 실학은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이라는 뜻에서 경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중략)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두산백과] https://naver.me/xl8oK7O7
말하자면, 실학은 기존의 유학의 전통에 기초한 헛된 학문(성리학)을 비판하며 나타난 실사구시의 학문으로서, 그저 헛된 이론과 관념에 그치지 않고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강조했다.
* 경세치용: 경세는 세상을 경륜한다는 말로, 국가사회를 질서 있게 영위하는 정치·경제·사회의 활동을 가리키고, 치용은 현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성취해가기 위해 적절한 제도와 방법을 갖추고 실천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경세는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사회적 제도와 다양한 수단을 필요로 함으로 치용을 요구하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두 개념이 결합하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용후생: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하는 용어이다. 경제가 넉넉해야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북학파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이들 북학파는 성리학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연과학의 도입, 중소상공업의 육성, 기술혁신 해외 통상 증진 등 국민의 경제를 향상할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실학운동에 힘을 기울였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실학파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민생과 밀접한 문제에서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되(경세), 그 목표를 실현할 만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제도와 방법을 강구해서 실제로 실천(치용)하고자 했다.
또한, 우선적으로 경제가 풍요로워지고 백성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도덕적 기강이 바로 선다(이용후생)고 믿었다.
지금까지 실사구시와 그를 토대로 한 실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는데, 김대중은 과연 실사구시를 어떤식으로 정치로 승화시켰을까?
● 김대중의 실사구시 정치
김대중은 실제로 이러한 실사구시 사상을 현실 정치에 녹여내고자 했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과 관념에만 갇혀있는 주장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서라도, 우리나라의 경제 및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정책들을 과감히 추진했다.
《 일본문호개방 》
김대중은 우리나라를 문화강대국으로 만들고, 일본과의 관계도 개선할 겸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김대중은 문화쇄국주의를 고집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강력히 피력했다.
그는 문화는 문화끼리 부딪히면서 재창조되고 발전한다고 보았다.
김대중은 "중국문화와 미국문화는 받아들이면서 왜 일본문화만 안된다고 하냐"라고 반문하면서, 일본문호개방이 오히려 한류열풍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정확히 짚었다.
한편, 김대중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야만국가가 되었을것"이라고 주장했다는걸 우리는 위 영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만 보면, 그가 유교를 굉장히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은 분명 자신의 자서전인 [옥중서신 1]과 [내가 사랑한 여성]에서 분명 반유교적 생각을 여실히 드러내보였으며 그는 자타공인 1세대 페미니스트였다.
다음은 김대중의 자서전인 [옥중서신 1] 중 398쪽과 399쪽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젊은이는 윗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질투하거나 자식 못 낳거나 하면 쫓아내는 칠거지악七去之惡까지 용납하던 남편 절대우위의 부부유별夫婦有別을 위시로 한 남존여비男尊女卑, 관존민비官尊民卑, 관료주의官僚主義, 형식주의形式主義 그리고 반상班常의 차별 같은 신분주의身分主義, 이런 것이 봉건도덕인 유교도덕의 골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교도덕의 재존중을 말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유교도덕과 우리 민족 고유의 도덕을 혼동한 예가 많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참혹하게 국민을 짓밟은 그리고 마침내 망국에까지 이른 유교도덕의 잔재를 털어버리는 매우 중요한 현재적 과업을 등한히하게 되고, 유교도덕 이전에는 우리 민족에게 도덕다운 도덕이 없이 야만이었던 것 같은, 자기 역사에 대한 무지와 모멸을 갖게 됩니다.
다음은 김대중이 자타공인 1세대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사랑한 여성]을 직접 집필했다는 내용이 자세히 담긴 포스팅이다.
https://the-fig-tree.tistory.com/m/22
김대중의 자서전 '내가 사랑한 여성': 페미니즘, 연애, 결혼, 좋은 배우자 조건
글쓴이는 사실 2013년 이전만 해도 노무현 지지자였다. 김대중은 그저 노무현의 악세사리와 같은 존재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노무현을 지지하면 김대중은 그저 그 뒤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존
the-fig-tree.tistory.com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공식석상에선 유교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을까?
우리는 그의 종교관 특성을 고려해야한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 김대중의 종교관 정보 출처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https://naver.me/53YqTigv)
가톨릭의 특성상, 어떤 종교 및 이념이 아무리 성경적 세계관과 상충되더라도, 그것을 대놓고 배척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행동하는 양심'이 자신의 모토였던 김대중은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편이 유교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대중은 1999년 3월 18일에 전국의 유교지도자 145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와 같은 뜻을 밝힌 적도 있다.
(아래에 해당 기사를 첨부하겠다.)
https://m.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49648#policyNews
[김대통령, 유교지도자 초청 오찬 연설문 (요약)]“민주주의 시대 충(忠)의 대상은 국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18일 유교의 충효사상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해 유교와 민주주의가 이념상 일맥상통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날 최창규(崔昌圭)성균관장 등 전
www.korea.kr
이것은 결국 위 영상 속에서 말하는 문화 재창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음은 MBC 뉴스에서 취재한 영상이다.
https://youtu.be/5s-FH0LAxMk?si=1pDs2oxdKlnpR0Tw
앞서 좌파 지식인들은 "일본문화를 받아들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문화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김대중은 오히려 일본문화의 유입을 공공연하게 막는 것으로 인하여 음지에서 일본의 나쁜 문화만 스며들어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컨텐츠들이 판치고있는 현실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암암리에 불법적으로 일본 컨텐츠들을 들여올 바엔 일본 컨텐츠 유통 산업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한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화는 날이 갈수록 진보하였고, 결국 일본 내 한류열풍이 불면서, 그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일본문호개방으로 한국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문화에 먹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즉, 이론과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 한미 FTA 적극 지지》
이 또한 좌파 인사들이 "한미 FTA 체결하면 미국의 경제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난리쳤지만, 김대중은 글로벌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한미 FTA 체결은 꼭 필요하다고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서 밝힌 바 있다.
(1) 청와대-백악관 X파일(144) ‘한미FTA 강력 지지’ 김대중, 미 대사에게 “양국에 큰 이득될 것” 강조
http://www.wikileaks-kr.org/news/articleView.html?idxno=138719
청와대-백악관 X파일(144) ‘한미FTA 강력 지지’ 김대중, 미 대사에게 “양국에 큰 이득될 것” 강
주한 미국대사들은 한국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도 종종 예방하거나, 대사관으로 초청해 그들의 시국관을 청취하곤 했다. 대사들은 전임 대통령의 발언들을 낱낱이 기록해 본국 국무부에 전송
www.wikileaks-kr.org
(2) DJ "한미FTA 체결위해 전력다해야"
https://naver.me/F7y2t38j
DJ "한미FTA 체결위해 전력다해야"
문재인 靑비서실장 예방.."북핵.남북관계에 중요한 해"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은 17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의 성공적 ...
n.news.naver.com
또한 김대중은 짧은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도 한미 FTA에 대한 지지 발언을 여러 차례 밝혔다.
(1) DJ "정부, 한미 FTA에 올인해야"
https://naver.me/FC4G1O8i
DJ "정부, 한미 FTA에 올인해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부가 한미 FTA에 올인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예방한 자리에서 한미 FTA와 관련해 군사안보 플러스 경제안보라는 큰 틀에서 홍보를
n.news.naver.com
(2) DJ, "한미 FTA, 겁낼 필요 없다"
https://naver.me/5MS8wR7E
DJ, "한미 FTA, 겁낼 필요 없다"
[앵커멘트]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미 FTA 추진 논란과 관련해 너무 겁내지 말고 대담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자신의 특사 자격 방북론에 대해서는 개인 자격으로 가서 자유롭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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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J, "FTA 대국민 설득에 전력 다해야"
https://naver.me/FARjtOeU
DJ, "FTA 대국민 설득에 전력 다해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미 FTA, 자유무역협정의 성공적 체결과 대국민 설득 홍보에 대통령과 정부가 전력을 다해야 한다'면서 '국민 여론이 움직이면 결국 국회와 시민사회도 움직일 것'이라고
n.news.naver.com
이렇듯, 김대중은 규제와 쇄국이 아닌 자율과 개방을 택했으며,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반대 여론에 부딪히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확실하게 밝혔다.
국운이 달려있는 문제일수록 그는 물러서지않았고, 국민들을 끝까지 설득하는 동시에 과감히 밀어부쳐야 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 주한미군 적극 지지》
김대중은 자신의 자서전인 [옥중서신]에서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해당 내용이 나와있는 부분이다.
f) 한국의 안보는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과 접경하고 각기 군사 동맹을 맺고 있는 중·소 양대국을 생각할 때 우리의 안보는 필연적으로 미국·일본과의 협력관계를 도외시하고는 상상할 수 없다. 특히 미국의 존재는 우리 안보의 사활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군의 철수가 기정사실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할 일이다. 도대체 모든 조건이 유리하고 안정된 서독에는 30만 대군을 두면서 그와 정반대의 불안한 상황 아래 있는 한국에서 3만 미군을 철수한다는 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으며 위험하기 짝이 없다. 미국은 왜 철군에 앞서 남북 간의 평화정착을 선행조건으로 공산 측에 내세우지 않는지 그 점도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의 재고를 강력히 주장한다.
-알라딘 eBook <옥중서신 1> (김대중 지음) 중 p.146에서
혹시 그 사실을 아는가?
김대중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당시에, 김정일 또한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있어야 하며, 남북통일 이후에도 미국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을.
아래의 영상엔 김대중의 그때 그 당시의 회고가 담겨있다.
김대중은 이처럼 우리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서 미국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미국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미감정을 이용하지도 않았고, 뜬구름 잡는 이론이나 관념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여 국익과 민생에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에만 몰두했다.
이상으로 실사구시의 정의와 함께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김대중이 실사구시를 현실 정치에 어떤 식으로 접목시켰는지도 짚어보았다.
사실 그의 그러한 태도가 엿보이는 정책 및 행보로는 위에 언급한 사례들 말고도 더 있지만, 여러번 강조해도 모자른 사례들만 엄선해서 다뤄보았다.
오늘날 좌파들의 반일ㆍ반미 기조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그의 기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김대중의 친일ㆍ친미 기조는 그의 실사구시적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들의 정서나 지식인들의 이론 및 관념에 얽매이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국익과 민생에 도움이 되는 길이 바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서 미국과 일본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그 누가 감히 친일친미 매국노라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한 나라의 리더라면,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정확히 그런 기조로 움직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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